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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파티장을 떠날 때이다.

최근 우리들의 관심을 끄는 토픽은  코로나바이러스 치료제나 백신 개발일 것이다. 최근 어떤 신문 기사에서 코로나바이러스는 항체가 잘 형성되지 않고, 병에 걸렸던 사람도 항체가 생긴 후 불과 몇 달 후면 항체가 약해져서 다시 병에 걸릴 수 있다는 기사였다. 나는 이 기사를 보면서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코로나바이러스의 속성이 우리들의 죄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버렸다고 생각되다가 다시 범하고…

복음 전도의 네가지 핵심 메시지

복음은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이다. 그 이유는 복음이 제시하는 내용들이 – 1. 하나님은 누구이신가 (창조하심과 거룩하심) 2. 사람은 누구인가 (죄인 됨과 마지막 운명) 3.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이신가 (성육신과 죽음, 그리고 부활) 4. 죄인이 구원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죄에 대한 회개와 복음을 믿음) – 우리의 영생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복음(세상에서 가장 복된 소식)은 죄로 인해 영적으로 완전히 죽은 우리 인간, 즉 영원한 파멸로 달음박질하는 우리 죄인이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한 주님의 말씀이다. 곧, 복음은 주님이 정하신 구원의 유일한 메시지이다. 이 복음에 대해 필자는 Grace Community Church에서 정리한 내용을 바탕으로 복음의 네 가지 핵심 주제를 여러분들과 나누고자 한다. 첫 번째로,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시며, 완전히 거룩하신 분이시다.  창세기 1장  1절에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고 말한다. 이는, 시공간을 초월한 하나님께서 어떤 특정한 시점에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보여준다. 성경은 또한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만드셨다고 증언한다 (창 1:27).곧, 모든 피조물의 근원이 하나님이신 것이다. 따라서 그 모든 소유권이 주님께 있음이 당연하다 (시 24:1). 온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그를 모시는 천사들은 주를 향해 이렇게 표현한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사 6:3). 이는, 하나님께서 완전히 거룩하시다 것을 나타낸다. 거룩이라는 단어는 “무엇으로부터 분리 또는 단절된”이라는 뜻인데, 이 분리는 죄와 완전히 끊어진 상태를 말한다. 결국, 하나님께서 거룩하시다는 것은 죄가 전혀 없으시다는 것을 뜻하며, 어둠이 전혀 없는 빛 그 자체이신 주님의 모습을 나타낸다. 요한은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요일 1:5). 곧, 주님의 거룩은 조금의 어둠 혹은 죄악도 허락치 않는 완전한 거룩인 것이다. 빛이신 하나님께서는 죄와 완벽히 단절된 순수 그 자체이심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거룩의 주님이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중요한 점은, 하나님께서는 그의 완벽한 거룩의 기준을 우리 인간에게 그대로 적용하신다는 점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주님은 우리로 하여금 그가 제정하신 법(주의 거룩을 대변하는)을 온전히 지킬 것을 요구하신다. 거룩하기 위해서 말이다. 야고보는 이에 대해,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라고 증언한다 (약2:10). 즉, 거룩의 조건은 모든 율법을 완벽히 지키는데 있다. 이는 곧, 모든 인류가 주님의 거룩하심에 결코 도달할 수 없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단 한 명도 거룩할 수 없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의하면, 마음에서 음란한 생각을 한 것 또한 주의 율법을 어긴 명백한 죄라는 사실을 보았을 때(마5:27-28), 인간 스스로는 주의 거룩에 결코 도달할 수 없음이 분명하다. 마음에서 하는 나쁜 생각 하나하나가 죄 된 행위를 낳는 동기일 뿐만 아니라 죄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절대 스스로 거룩할 수 없다. 두 번째로, 우리는 모두 주님의 법을 어긴 범죄자이다. 모든 인류의 조상 아담은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였고, 주의 권위 밖으로 이탈하여 결국 죄의 권세 아래 있기를 선택했다. 죄인이 되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의 불순종은 곧 주님과의 관계의 단절로 이어졌다. 죄와 함께 하실 수 없는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죄인이 된 아담과 그 관계를 지속하실 수 없음은 당연하다. 곧, 아담의 죄는 주님과의 관계를 단절시켰고,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이 되었다. 아담의 후손인 우리의 신분은 죄의 후손 – 죄인–이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한 사람(아담)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롬5:12). 아담의 죄는 모든 인류를 덮쳤다. 하지만 바울은 우리 또한 죄를 지은 범죄자임을 명확히 선포한다. 아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죄인이 된 것이 아니라, 아담과 같이 주님의 권위를 의도적으로 부정하고 그의 법을 어긴 자들 이라는 것이다. 그 증거로 성경은 우리 마음이 완전히 부패하여 주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는 죄인이라 선언한다 (롬3:23; 렘 17:9). 우리는 주님의 법을 어긴 대가를 반드시 치를 것이다. 그 대가는 “사망”인데, 성경은 죄의 값은 사망이라 선포한다 (롬 6:23). 이 사망은 육체적 죽음뿐만 아니라, 영적인 죽음을 포함한다. 이 죽음은 지옥에서 맞이할 영원한 고통을 가리킨다 (계21:8). 이는 어떠한 환상이 아닌 실제적 세계를 말한다. 곧, 우리 인간은 멸망의 구렁텅이로 달음박질 하고 있는 운명에 처해있는 것이다. 추상적 관념이 아닌 실제로 말이다. 더욱 절망스러운 것은, 우리 인간은 이 죄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다. 아무리 자신의 행위가 그럴듯해 보여도 말이다. 사람의 눈에 고귀해 보이는 어떠한 도덕적 의로움도 그의 죄 문제를 결코 해결하지 못한다. 그러한 능력이 인간 자신에게 전혀 없기 때문이다. 마음이 완전히 부패하여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이 어떻게 선한 행위를 낼 수 있겠는가. 주님의 관점에서 그 행위는 그저 악할 뿐이다. 선지자 이사야는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우리는 다 잎사귀 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 (사 64:4). 따라서 모든 인간은 영원한 파멸로부터 스스로 구원할 능력이 전혀 없다. 주님 앞에 우리의 행위는 모두 악하기 때문이다. 세 번째로, 죄인을 구원하러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신 동시에 참 인간이시다.  예수님은 메시아이시다. “메시아”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헬라어는 그리스도)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 이는 예수께서 특별한 역할을 수행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음을 나타낸다. 곧, 예수 그리스도(메시아)라는 뜻은 죄인을 구원하시는 구세주이신 예수님을 지칭한다. 예수님만이 인간의 죄를 해결하실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태어나셨다. 완전한 하나님이 완전한 인간이 되신 것이다.인간의 죄를 대신 지시기 위해서 말이다. 그리고 그는 평생 아버지 하나님의 율법을 모두 지키셨다. 결국, 불완전한 우리를 대신해서 완전한 본이 되신 것이다. 온전한 인간이 되심으로 말이다. 그 정점에는 십자가 사건이 있다.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 우리가 져야 할 영원한 형벌을 대신 지셨다. 그는 죄가 없으신 참 하나님이시지만 (히4:15; 고후5:21), 인간이 되시어 기꺼이 우리 대신 죄의 저주를 끌어 안으셨다. 유일하게 율법의 기준에 합당하신, 즉 죄가 전혀 없으신 분이셨음에도 그 당시 가장 악랄한 죄인에게만 주어졌던 십자가 형벌을 받으셨다. 우리 죄인을 살리시기 위해서 말이다. 십자가에 못박혔던 예수님은 죽은지 삼 일 만에 부활하셨다 (고전 15:4). 부활은 그가 죄인을 구원할 수 있는 참 구세주임을 증명한다. 구약성경 곳곳에서 증거한 그 메시아가 바로 예수님이시며, 그를 믿는 모든 자에게 구원의 선물을 주실 수 있는 참 하나님이심을 또한 드러낸다. 죄로 인해 영적으로 완전히 죽은 우리를 살릴 수 있는 오직 한 분 예수님. 그의 부활은 이 사실을 증명한다. 네 번째로, 우리는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 “회개”라는 단어는 “죄 된 마음과 태도 그리고…

보라!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셨는가?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금요일을 우리는 Good Friday Day라 부른다. 아마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심으로 모든 믿는자들의 죄가 사해졌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는 것인지 모르겠다. 같은 맥락으로 예수님께서 아버지께서 명하신 모든 일을 다 이루셨기에 그렇게 부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렇게 부르는 이유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죄인들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고, 그로 인해 누구든지 그를 믿는자는 영생을 얻게 되었기에 좋은 날이다. 그러나 금요일을 맞이하기 전, 목요일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신 예수님의 기도는 이 날을 좋은 날이라고 부르기가 주저된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해 기도(요 17)하시고 겟세마네 동산으로 들어가셨고(요 18:1) 피땀을 흘리시며 기도하셨다 (마26:36-46,  막 14:32-42,  눅  22:40b-46). 다른 제자들을 남겨 두시고(눅 22:40),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마 26:37; 막 14:33)만 데리고 가시면서 예수님은 고민하고 슬퍼하셨다. 예수님은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셨다. 이어서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마 26:38-39; 막 14:35-36; 눅 22:41-42)라고 세번이나 같은 기도를 하시며 괴로워하셨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시기 위해서 오신 것은 아버지의 계획이었고, 아버지의 계획에 순종하여  자신이 어떠한 죽음을 마지 할 것이라는 사실을 아셨는데,  왜 모든 일을 다 이루실 하루를 앞두고 이렇게 두려워 하신 것일까? 끔찍한 죽음이 두려우셨던 것일까? 사람들 앞에서 발가 벗기실 치욕과 십자가에서 못박힐 고난과 이제 당할 죽음의 고통이 너무나 두려우셨던 것일까? 아무 죄도 범하지 않으시고 완전한 삶을 살았는데 이런 끔찍한 죽음을 당하시는 것이 너무나 억울 하셨던 것일까? 예수님은 동산으로 가시기 전에 제자들을 위해서  기도로 예수님은 그 고통의 이유를 설명해 주신다. (좀 길지만 예수님과 아버지와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어서 읽으시기 바랍니다.) 요한 복음 17: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이성의 패배를 통해서 배우는 교훈 (여호수아 7,8장)

교회에서 모든 성도가 함께 읽고 있는 여호수아 7장의 사건은 하나님은 죄와 함께하시지 않으시고 죄를 미워하신다는  사실을  ‘아이성’의 패배를 통하여 확실하게 알게 해 주셨습니다. 패배를 경험한 이스라엘과 여호수아는 8장에서 처음보다 더 많은 군대를 동원하여 아이성을 치기 위하여 자신이 직접 앞장서서 진행하였고 승리하였습니다. 이 승리는 여호수아의 승리도 아니고 이스라엘이 더 많은 군대를 동원해서 얻은 승리도 아닙니다. 이…

교회 기도와 섬김의 기회 (Church Prayer & Delivery Ministry)

사랑하는 성도님 안녕하세요, 못 본지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오랫동안 못 본 것 같이 보고싶습니다. 지금 코로나를 진압하기 위하여 나라가 최대치의 조치를 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얼마나 오랫동안 이렇게 인터넷으로 주일 예배를 드려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비록 몸은 떨어져 있어 자주 만나지는 못하지만 저는 이 시간이 하나님을 섬기는 자녀들로서 서로를 돌보고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형제를 판단하는 마음이 들 때

작은 교회나 큰 교회나 할 것없이 우리는 우리가 한 아버지의 자녀라는 사실을 잊어 버리고 믿음이 약하거나 신실하지 못한 형제 자매들을 대하면서  쉽게 판단하고 정죄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저 사람은 왜 매일 예배 시간에 늦지? 저 형제는 왜 교회 행사에 잘 참석하지 않지? 저 자매는 왜 만나면 세상적인 이야기를 하거나 우스개 소리로 사람들을 무안하게…

2019년 교회 소식

 안녕하세요!  지난 2019년도에도 그레이스 성경 교회를 위해 기도와 헌금으로 후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2019년은 이제 시작 하는 교회로서 이런 저런 많은 시도도 하며 사역들이 자리를 잡아가는 해가 아니었나 생각해 봅니다. 많은 분들이 저희 교회를 방문하여 주셨고 그 중에 저희 교회의 정식 멤버로 등록 하신 분들도 계십니다. 외적으로 크게 눈에 띄는 성장이 있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이스라엘의 제사를 통해서 배우는 교훈

우리 교회의 많은 성도들이 함께 읽고 있기 시작한 구약 성경 중, ‘민수기’ 읽기가 이번 주가 지나면 끝이 나고 다음 주부터 ‘신명기’ 읽기가 시작될 것입니다. 레위기에 이어서 민수기를 읽어 내려가면서 누구나 참 많은 제사가 있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이 제사들을 통해서 저는 택하신 백성들을 거룩하게 인도하시고 유지하시려는 하나님의 열심과 사랑을 제사 제도를 통해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 제도들이…

내 자신에게 복음을 전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대신 지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자신의 백성에게 참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셨다는 이 소식 복음. 이 복음 메시지야말로 성경 66권이 말하는 핵심이자 모두가 알아야 할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소식이다. 이 복음을 믿음으로 우리는 구원 받았다. 아무것도 할 수 없던 죄인인 우리가 말이다. 주님의 측량할 수 없는 그 은혜로, 값없는 선물로 우리는 죄인에서 의인의 신분이 되었다. 우리의 행위가 아닌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믿는 믿음으로 말이다(롬3:28).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사랑이 우리를 살리셨다. 그런데, 안타까운 사실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참 구원 안에 있는 성도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이 복음을 등한시 여기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마치, 구원을 이미 받았기 때문에 더이상 이 기초적인 복음이 더이상 자신에게 필요 없다는 듯, 혹은 이를 다 깨달았다는 듯이 말이다. 이 단순해 보이는 메시지를 넘어 더 고등한 무언가를 알아야만 신앙 생활을 제대로 할 것 같은 생각들이 우리를 사로잡을 때 종종 이러한 오류를 범하게 되는데,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복음은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할 뿐만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더욱 예수님을 닮아가게 하는 역할을 한단 말인가? 즉, 구원 뿐만 아니라 성화를 이루게 하는 주님의 능력이란 말인가? 나는 확신을 가지고 이렇게 말하고 싶다. 정말 그렇다고 말이다. 복음은 우리를 주께로 처음 인도할 뿐만 아니라, 계속 주님 안에 거하여 주를 더욱 바라보게 함으로 그를 더욱 닮게 하는 온전한 주님의 능력이다. 우리는 사도 요한을 통해 이를 좀 더 명확히 알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영적 제자들에게 지속적으로 복음을 전했는데,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진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알기 때문이요” (요일 2:21). 또한, 그는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아들과 아버지 안에 거하리라 (요일 2:24)” 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처음부터 들은 것” 은 요한의 제자들을 구원으로 이끈 “복음 메시지”를 뜻하는데, 그가 이미 구원받은 제자들에게 이 복음 안에 계속 거하라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제자들이 복음의 진리 가운데 있으면 있을 수록 주님과 더욱 가까워 진다는 것을 요한은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요한의 개인적인 견해가 아닌, 그를 통해 성경을 기록하신 주님의 온전하신 뜻이다. 따라서, 우리가 복음을 나 스스로에게 전해야 함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임이 분명하다. 주님과 더욱 가까워 지기 위해 말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주님을 더욱 닮기 위해우리는 자신에게 먼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이를 좀 더 구체화 하기 위해 세가지 메시지를 가지고 복음을 왜 나에게 전해야 하는지 같이 살펴보길 원한다. 1. 복음을 나에게 전함으로 주님의 영광을 바라볼 수 있다.  주님의 영광이라는 단어만큼 성도의 가슴을 뜨겁게 만드는 것은 없을 것이다. 무한 하시고, 영원 하시며, 전지 전능하시고, 무소부재 하시며, 시간을 초월하시고, 창조자 되시며, 세상 모든 만물의 주인 되시고, 세상 권세 즉, 사탄을 제압하시며, 죄가 전혀 없으신 동시에 우리 인간의 죄를 심판하시는 즉, 온 우주의 심판자 되신 주님. 이러한 완벽한 분이신 주님께 가장 합당한 단어가 바로 “영광” 임에 틀림없다. “영광”은 어떤 발광체의 빛이 너무도 밝아 가까이 갈 수 없거나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그런 찬란한 모습을 연상케 한다. 그리고, 그 빛은 어둠 가운데 있는 것을 모두 드러내어 감추인 것이 아무것도 없게 하는 모습을 또한 상상케 한다. 곧, 죄도 없고 흠도 없으신 주님의 완벽한 모습을 표현하는 이 단어는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높으심을 찬양하게 만든다. 또한, 이 영광은 우리를 두려움에 떨게 만들 수도 있고, 죄를 선명히 드러내 보여주기도 하며, 주님과 우리의 간극이 얼마나 큰지를 극명히 보여주기도 한다.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은 우리를 변화시켜 예수님 자신을 닮게 만든다.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고후3:18). 즉, 매일의 삶에서 우리의 주인 되신 예수님의 영광을 바라보면 볼 수록 그 분의 형상으로 변화될 수 있음이 확실하다. 그렇다면, 주님의 영광을 어떻게 바라볼 수 있을까? 그 답이 복음에 있다. 성경이 증언하기를,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낸다 말한다 (고후4:4; 딤전1:11).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은 찬란한 주님의 영광을 우리에게 비추어 그 위대하심을 보게 만든다. 곧, 단순해 보이는 복음 메시지 안에 주님의 충만한 영광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매일 우리 자신에게 복음을 전함으로 주님의 영광을 덧입어 예수 그리스의 형상을 점점 닮아갈 수 있다. 복음을 통해 우리의 모습이 영광에서 영광으로 점점 변하게 되어 주님의 거룩을 이뤄갈 수 있는 것이다. 2. 복음을 나에게 전함으로 예수님의 의로우심을 바라보게 만든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 있다고 성경은 말한다 (롬1:17). 복음은 하나님의 의로우신 뜻이다.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죄인을 구원시켜 그의 신분을 탈바꿈시킨다. 죄인에서 의인으로 말이다. 어떠한 세상 권세나 능력으로도 결코 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죄인의 신분을 변화시키는 것인데, 복음은 그것을 가능케 한다.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복음만이 그것을 할 수 있다. 복음의 주인공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가 전혀 없으신 완전하신 하나님이시다 (히4:15). 이는, 어떠한 인간도 결코 의로울수 없는 반면, 죄가 없으신 예수님만이 의로우시다는 것을 드러낸다. 곧, 복음은 우리로 하여금 나 자신의 의로움(의로운 것이 전혀 없는)을 의지하는 것 대신, 오직 믿음이라는 수단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전가(덧입혀짐) 받도록 이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의롭게 되는 것이다(롬 3:28; 4:5). 즉, 구원은 예수님의 의로우심으로 우리의 죄가 가리워지는 놀라운 역사이다. 따라서, 의인의 신분이 된 우리는 복음을 더욱 묵상할 필요가 있다. 내가 소유한 이 의로움이 과연 나로부터 출발한 것인지,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허락하신 은혜인지를 깊이 깨닫기 위해서 말이다. 이러한 복음화를 통해, 우리는 더욱 예수님을 의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오직 의로우신 그분을 따라 자신이 처한 곳에서 그분의 의로우심을 주위 사람들에게 흘려 보낼 것이다. 복음을 매일 나 자신에게 전함으로 말이다. 3. 복음을 나에게 전함으로 예수님의 사랑을 더욱 깊이 깨달을 수 있다.  복음은 예수님의 희생적 사랑의 메시지이다. 하지만, 인간의 완악한 죄성을 폭로하며, 더럽고 추악한 우리의 마음을 비추는 이 복음이 어떻게 사랑의 메시지란 말인가? 세상이 말하는 한없이 품어주고, 안아주는 달콤한 그러한 메시지가 아닌데 말이다. 되려, “나”라는 자아를 말살시키려 무장된 날카로운 칼과 망치 같이 느껴지는데 말이다. 어떤 면에서 이 말은 일리가 있다. 복음의 능력이 죄 안에 빠져 영적으로 완전히 죽었던 “예전의 나”(구원받기 전)를 영적으로 거듭난 “새로운 나”(구원받은 후)로 바꾸기 때문이다. 하지만, 믿지 않는 자들이 생각하는 폭력적인 이미지의 복음은 성경이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을 막다른 낭떠러지로 몰아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만드는 그러한 메시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복음은 그들의 자아를 비인격적으로 파괴하는 잔인한 메시지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되려, 복음은 죄에 속하여 파멸의 길로 달음박질하고 있는 죄인을 향하신 주님의 인격적, 희생적 사랑을 극명히 드러낸다 (롬5:8–11).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요일3:16). 복음은 말한다. 우리 스스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는 이 죄를 예수님께서 대신지셨다고 말이다.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그 귀한 생명을 기꺼이 내어 주신 이 복음을 통해서만 우리는 무엇이 진짜 사랑인지 알 수 있다. 구원받은 우리는 예수님의 희생적 사랑으로 변화된 자들이다. 무가치한 우리를 가치있는 자로 여겨 주신 그 은혜의 사랑으로 말이다. 이 사랑으로 우리는 영적으로 다시 태어났고, 지금도 그의 풍성하신 사랑을 공급받아 살고 있다. 그리고, 복음에 나타난 그숭고한 사랑이 나 자신만을 향했던 배타적인 모습에서 이웃을 향한 이타적인 사랑을 낳도록 이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복음을 전해야 한다. 먼저 나 자신에게 말이다. 복음을 묵상하면 묵상할 수록,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주님을 점점 더 사모하게 될 것이다. 변화의 원동력이자 영양분인 그 사랑을 지속적으로 공급받음으로 우리는 영적으로 더욱 강건하게 설 것이다. 그리고, 자기애에 빠져 나 자신을 증명하려 애쓰는데 시간을 할애하지 않을 것이다. 되려, 온전한 사랑의 절대적 메시지인 복음을 묵상함으로 주님의 희생적 사랑을 내 주위 사람들에게 흘려 보내게 될 것이다.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닌 행함과 진실함으로 말이다 (요일3:18).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보여주신 그 본을 따라 우리는 그러한 열매를 점점 맺게 될 것이다. 복음을 통해 말이다. 결론 우리는 이 영광스럽고 정의로우며 사랑이 넘치는 복음을 믿어 영적으로 새롭게 태어난 자들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복음으로 사는 자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복음을 전해야 한다. 바라기로는 여러분 각자의 삶 가운데 복음을 나 자신에게 전함으로 예수님의 거룩하신 인격을 매일 매일 닮아가길 진정으로 소망한다. 부록: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Learning from Leviticus

제가 번역한 레위기에서 배우는 교훈의 원문입니다. 한글 번역에서는 일부 한 페라그라프를 삭제 했지만 이 글은 전문을 그대로 카피해서 옮겼습니다. Source: “ Wiersbe, Warren W. 1996 Be Holy. “Be” Commentary Series. Wheaton, IL: Victor Books. The fact that God devoted an entire book of the Bible to the subject of holiness would indicate that it’s an important subject,…